오후에 첫눈이 온다는 예보가 있는 날
오전에 78세 할머니가 오셨다
예쁜 색깔의 털실들이 그라디에이션된 장갑을
벗어 가지런히 진료실 테이블에 올려놓으셨다
마치 자랑하고 싶은 여중생처럼
따뜻하고 예쁜 장갑이네요
내가 인사를 건내자
기다렸다는 듯이 오빠가 선물해줬다고 했다
갑자기 내 여동생이 생각났다
그렇게 다정하지 못한 나
은은하게 화장한 예쁘장한 할머니를
바라보고 있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온갖 짜증이 빈틈없이 자글자글한 얼굴로
불평과 악다구니를 남기고 나가는
무덤 안과 밖이 하등 다를 바 없는
요양원에서 온 환자와는 사뭇 다르다
불편한 증상을 묻지 않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나에게 할머니는
1년 전부터 사귀었다다는 남자 친구를 자랑해싸
두 살 연상의 오빠라고 부르는
장갑을 선물한 남친은
자신의 신발끈을 메어주고
자기를 이쁜이라고 부른다 했다
황혼의 로맨스,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한가
진료실 모니터로 시선을 옮겨봤지만
내과에서 먼저 검사 중인 환자들이 대부분이어서
브레이크 타임처럼 잠시 쉬어가기로 하고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남친은 맛있는 것 먹다가도 전화해서
우리 이쁜이 다음에 같이 와서 먹자고 해요
일요일 공원에서 봤던 잎파리를 다 떨군
백목련의 꽃몽오리가 생각났다
따뜻한 3월의 햇볕이 손을 데면
빵 터질 것 같은 백목련꽃
남친의 손길이 그리운지
자꾸 손을 만지작 거렸다
할머니,
그분이랑 자주 만나 맛있는 것 드시면서
행복하고 건강하게 사세요
아주 좋아 보여요
할머니,
그런데 할아버지와 사별하신지 얼마나 되셨어요?
할아버지는 있지
너무 오래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