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장님,
은인이 오셨어요
나는 미소짓는다
들어오시게 하세요
작은 키에 무성한 머리칼과 눈썹은 신선처럼
하얀 분이시다
1년에 세 번 정도 찾아오시는 분,
오늘은 손수 경작한 고구마를 가지고 오셨다
내가 레지던트 2년 차였으니 37년전이다
신정 연휴에 모처럼 전주에 계시는 어머님을 찾아뵐 계획이었으나, 부천에 있는 대형산부인과병원 당직이 펑크 났다며 나를 트레이닝 시키던 과장님은 그 병원을 도와주어야겠다고 나를 불렀다
MZ 세대가 부르는 요즈음 수련의들은 거절할 수 있겠지만
그 시절 레지던트가 과장님의 부탁을 거절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후로 이틀에 한번씩 밤이면 off가 주어지는 살인적인 수련시절에도가난한 나는 가끔씩 그 병원 당직을 서면서 용돈을 벌었다
그 병원에서 당직하던 하루는 쌍태아 임신부가 진통이 시작되어 한밤중에 분만실에 왔다
급히 제왕절개로 두 아이는 건강하게 태어났으나, 이완성자궁출혈로 급히 수혈이 시작되고 산모를살리기 위해 불가피하게 자궁적출술까지 시행해야 했다
밤을 꼬박 새운 당직이었다
당직을 끝내고 수련병원으로 출근하는 나에게
수고 많았다며 당직비보다 훨씬 많은 봉투를 주었다
나는 한사코 받지 않았다
당직실 분만 하나 없이 잠만 자다 가면 당직비를 반납해야 하는 논리라고 당직비만 챙겨왔다
산부인과 전문의 시험을 앞두고 그 병원 사무장님
—모두들 그 분을 구 부장님이라 불렀다—이 나를 만나러 왔다
전문의를 취득하면 그 병원에서 근무했으면 한다고 했다
감사하지만 나는 개업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더구나 가장 중요한 개업 자금도 하나 없이 무작정 개업한다고 떠들고 다녔으니 돈키호테의 기행에가까운 것이었다
한참 전문의 시험 준비에 열중할 때 그분이 나를 시흥시에서 만나자고 해서 찾아갔는데,
지하 1층 지상 4층의 병원 건물에
“최준렬 산부인과 3월 개업 예정”이라는 프레카드를그분이 벌써 걸어 놓았었다
1991년, 시흥시에서개인병원 건물 중에서두 번째로 큰 일반외과 병원이었다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이 세차게 뛰었다
구 부장님이 건물주인 일반외과 원장님에게 어떻게 나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지만,
개업 자금이 하나도 준비되지 않은 처음 보는 나에게 그 건물을 통째로 내주었다
산부인과 장비및 인테리어 간판등은 내가 부담하고 순수익을 배분하는 방식이었다
누나와 친구가 빌려준 4000만원으로 개업의 꿈이 이루어졌고 나름성공한 개원의가 됐다
구 부장님이 선물을 가지고 오셨다 가실 때마다 직원들에게 그 분과의 인연을 말하면서 내 은인이라고 말했다
그 후로 부인 오시면
직원들 모두는 “원장님 은인”이라고 부른다
지금의 나는 그 은인 덕에 존재할 수 있었고
그 은인분은 나를 만날 때마다 자꾸 성장하는
우리 병원의 모습을 보면서 행복하다고 기쁘게 말씀하신다
큰 교회 장로님이신 내 은인,
혹시 예수님이 나에게 보낸 천사가 아닐까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