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 일기 19

허리 굽은 91세의 할머니는 유모차를 밀고

진료실에 오셨다

 

맑은 피부에 키가 크고 가느다란 몸매

조용하고 품위있는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할머니의 리즈시절을 상상했다

 

오랫동안 산부인과에 다닌 적이 없다는

할머니는

그 연세에 대부분 그러하듯 빈뇨가 문제였다

 

노화의 증상 중에 하나이지만

큰 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근심 가득했다

 

다른 대기 환자도 없고 해서

할머니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드려야겠다고

결심했다

 

잔잔한 목소리에 큰 굴곡없는 톤과 리듬으로

똑같은 증상을 반복해서 이야기 했다

 

옆을 의식해서 젊은 직원에게

요즘은 이렇게 속바지를 입지 않지만

우리 때는 꼭 입었어

 

주제를 벗어난 이야기는

그 정도였다

 

몇 차례 반복되는 증상을 듣고 있으면

그 다음에 나올 이야기가 확실히 예측되는...

 

그러나 오늘은

말씀을 자르지 않고 끝까지 들을 것이다

 

줄립기까지 했다

 

처음으로 시도해본 끝까지 들어주기 미션은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할머니, 잠깐만요

혹시 보호자랑 같이 오셨나요?

 

아니요, 혼자 왔어요

 

주소를 보니 몇 년 전 신축한 아파트에 오신 분이다

 

빈뇨의 원인과 치료 방법

그리고 처방전을 드리겠다고 설명하고

진료를 마칠까 했는데

 

녹음 테이프를 되돌리듯

똑같은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셨다

 

할머니와 나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서로 섞이지 못하고

의미없는 말들이 진료실 작은 공간을

맥없이 떠돌분이었다

 

할머니가 내 진료를 방해할 의도가 없으니

내가 화를 낼 사유가 되지 않고

 

할머니의 잘못도 아니고

이 또한 노화의 현상이니

할머니를 미워할 수도 없는 일이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계속되고

할머니를 제지해야 할 대기 환자도 아직 없고

 

내가 할머니처럼 저 나이까지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다면 그때 내 모습은?

나도 저 모양으로 누군가 앞에서

천치처럼 중얼거리고 있을까

 

내 앞에 앉아 있는 젊은 의사는 한숨을 쉬면서

지금 나처럼 답답해 하고 있을 것이다

 

할머니는 중얼거리고

나는 몽상에 빠져있는

평화로운 진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