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야,
이제는 대충대충 살다가
그냥 죽어버리자
몇 번 기침으로 폐암이 아닐까
밤늦게 전화하지 말고
친구야,
오늘 아침 변기에 잠시 아롱거렸던
붉은 피 몇 방울로 대장암이 아닐까
울먹이지도 말고
친구야,
아직 확진되지 않은 췌장의 작은 혹 하나
스티브 잡스가 걸린 병이라 지레짐작하고
인생 마지막 여행 다녀오고
가족들 눈물 먼저 빼놓지 말고
미리 머리 밀고 벙거지 사서
항암제 맞을 준비하지 말고
친구야,
자잘하게 보내오는 그 많은 몸의 신호들
모두 다 수신하다 보면 지독한 불면 찾아오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우울
친구야,
너무 자주 네이버 아저씨께
몸이 호소하는 증상들 묻지 말고
그냥 산과 들로 나가버리자
바람에 흔들리는 야생화와
눈 맞추고 향기 맡아보고
자분자분 말을 걸다가
꽃들이 시들면
우리도 단풍처럼 곱게 물든 인생
정갈하게 말려 가면서
몸과 마음 사위어 사위어 가면
그때는 어쩔 수 없는 겨울이 오지
넉넉하지 않은 세월이지만
그래도 충분히 살았던 인생
오늘 밤 만나 막걸리 한 잔 후루룩 마시고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가 누웠는가’
옛시조 한 구절 읊으며
호방하게 묘지를 바라보자
마침내 깊고 긴 어둠이 찾아오면
그때서야 우리들의 영원한 침실로
들어가자